또 꿈을 꿨어. 이번에도 아주 정신 없는 악몽이었는데...
난 연구실 복도에 서있었고, 저기 복도 끝에 네가 보였어. 난 혈기가 도는 손으로 총을 고쳐 잡아 네 머리를 정확히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어. 네 머리에선 피도 한 방울 튀지 않았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를 말이야. 그때쯤 꿈이 아니란 건 알아차려야 했는데!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지? 아, 그건 나도 알지! 농담이야 농담!
나는 총성을 듣고 달려오는 다른 좀비들을 피해서 너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쳐 문을 열었어. 네가 그들 발에 치이든 짓밟히든 관심도 없었어.
"뭐야, 섭섭하게... 그나저나 요즘 꿈을 많이 꾸네." 창살을 사이에 두고 앉은 네가 노트에 눈을 꽂고 내 말을 기록하며 답했다. 이런 걸 다 기록을 하는구나.
"응. 전에는 이렇게 많이 꾸지는 않았는데, 반 좀비되고 하는 일이랄 게 잠자는 것 밖에 없어서..."
"뭐 그래도, 아직 뇌가 일을 하고 있다는 거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하곤, 정직하게 '하하' 소리를 냈다. 네가 농담을 할 때 나오는 습관. 네 알 수 없는 농담들은 그 이상한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거기에 큰 웃음 소리로 답한다. 네 농담이 아무리 재미가 없어도 네 웃음 다음엔 내 웃음 소리로 마무리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이 과정을 지나면 분위기가 기분 좋게 풀어진다.
"아, 맞다. 아까 발가락이 떨어져 나왔어."
"아까? 언제?" 네가 고개를 홱 수그려 둥그레진 눈으로 내 발을 좇으며 물었다.
"아까 오전에, 네가 다녀간 직후에." 나는 차분한 베이지 색 러그를 밟고 지나가, 선반에서 새끼발가락을 찾아왔다. 으, 징그러. 다시 창살 옆 의자에 앉아 발가락을 건네 주곤, 새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맨발이 잘 보일 수 있게 의자 위에 얹었다.
"날 다시 부르지 그랬어?"
"다른 건 멀쩡한데 뭘. 네가 미리 설명해 준 거잖아. 딱히 아프지도 않아."
네 긴 숨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볼펜을 파란 심으로 딸깍 바꾸고, 노트 중간에 새 글자를 추가했다. "다음부터는 그냥 불러도 돼. 이게 내 일이야."
나는 느릿하게 두 번 끄덕였다.
느릿하게. 내가 이 방에 들어온 지 이틀 째 되는 날 네가 신신당부 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하루 세 번 약을 주사할 거야. 너는 더 이상 변하지 않겠지만, 이미 굳은 몸을 되돌릴 수는 없어. 쉽게 부숴지지만 고칠 수는 없을 거야. 제발 조심히 다뤄 줘. 절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느릿하게.
과거의 나에게 시간은 항상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그에 발 맞춰 정신 없이 달릴 수 있었다. 이 방에 가만히 앉아 그저 시계가 천천히 움직이는 걸 지켜보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네가 하는 설명을 가만히 들으며 방 한 구석에 직접 그린 달력을 멍하게 쳐다봤다. 하늘색 크레용으로 그린 달력이다. 너에게 부탁해서 받은 어릴 적에나 쓰던 크레용. 연필에는 긁히거나 다칠 위험이 있어 부드러운 크레용을 준 것이겠지. 걱정이 너무 많아도 너무 많다.
매끈한 하얀 벽에 하늘색 크레용을 진하게 새기기 위해 신중하고 천천히 선을 그었었다. 적어도 몇 주는 지난 것 같은데, 달력에 표시된 엑스 표시는 오늘 아침에서야 일곱 개가 되었다. 시간이 점점 더디게 흐르는 것 같다.
“그럼 9시에 다시 올게.”
네가 어느 새 일어나 복도로 향하는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창살 곁에 두었던 의자를 다시 둥근 책상 앞으로 굴려 돌려놓았다. 굳게 닫힌 문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지금쯤 저 복도 끝에 네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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